[본문 말씀]
욥기 24장 9-12절
9어떤 사람은 고아를 어머니의 품에서 빼앗으며 가난한 자의 옷을 볼모 잡으므로
10그들이 옷이 없어 벌거벗고 다니며 곡식 이삭을 나르나 굶주리고
11그 사람들의 담 사이에서 기름을 짜며 목말라 하면서 술 틀을 밟느니라
12성 중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이 신음하며 상한 자가 부르짖으나 하나님이 그들의 참상을 보지 아니하시느니라
[본문 묵상]
욥기 24장은 엘리바스의 세 번째 말에 대한 욥의 대답입니다. 엘리바스는 굉장히 노골적으로 '욥이 결과의 원인'이라고 말합니다. 욥은 이에 대해 '과연 네 말이 옳으냐'라며, '그렇다면 악인들의 형통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를 묻습니다. 그리고 실제 악인들이 형통하게 사는 경우를 계속해서 말하는데, 그게 욥기 24장의 주된 내용이 됩니다.
친구들이 말하는 신앙의 정답으로 설명할 수 없는 현실을 언급하며 전달하고자 하는 욥의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이는 현실과 소통을 잃어버린 신앙이 과연 옳은지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친구들은 자신들이 가진 정답 위에 올라가 무엇이 옳은지를 판단하고 정죄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할수록 현실과는 소통이 되지 않습니다. 그 정답으로 설명할 수 없는 현실을 힘으로 누르려고만 합니다. 이 일의 희생자가 바로 욥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좋은 신앙은 확실한 정답을 가지고 현실을 누르는 게 아니라 현실과 소통하는 신앙입니다. 현실과 소통하는 데 있어 중요한 것은 '듣는 것'입니다. 친구들은 현실과 소통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듣지' 않습니다. 듣는 것보다 말하는 것을 더 즐거워합니다. 실제로 욥의 말을 듣기보다 그들은 계속해서 자신들이 말하는 정답만을 되풀이하며 '말'만 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은 어떻습니까. 정답을 내세워 우리의 현실을 누르는 불통의 신앙입니까. 아니면 정답이 있기 때문에 이해되지 않는 현실에 대해서 충분히 들으며, 모르는 것에는 모른다 말하는 소통의 신앙입니까. 저는 우리 모두의 신앙의 지향점이 이런 소통의 신앙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소통의 신앙은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살자는 게 아닙니다. 그 정답을 가지고 이해되지 않는 현실을 힘으로 누르지 않는 것,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모른다 말하는 것, 내 정답을 쏟아내기보다 상대의 말을 들어주는 것과 같은 일이 바로 소통하는 신앙입니다.
이러한 소통의 신앙을 생각할 때, 사실 우리의 신앙의 시작점이 바로 이러한 '소통'에 있음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같이, 사람의 몸을 입고 우리 곁으로 오신 사건이 바로 그분의 소통이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은 '소통'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이해되지 않는 현실로 들어오셨고, 우리와 같이 되셨으며 우리가 겪는 모든 일들에 소통하셨습니다. 그분이 우리와 같이 되심으로 그분은 낮아지셨습니다. 그 소통이 가능한 이유는 그분이 우리와 같이 낮아지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우리의 현실 속에서 신앙인으로 불통이 아닌 소통의 자리에 선다는 건 낮아지는 것입니다. 낮아짐만이 소통할 수 있는 신앙인의 길을 걷게 합니다. 우리가 가진 정답은 높아짐으로 정답을 확인하는 게 아닙니다. 낮아짐으로 그 정답을 확인합니다. 정답이신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낮아지신 것과 같이 말입니다.
부디 우리 컴그 모두가 이 '낮아짐'이라는 소통의 길을 통해, 이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소통이 되는 신앙인의 삶이 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사랑합니다.
-세줄요약-
1. 욥은 친구들의 정답으로 설명되지 않는 현실을 말합니다.
2. 좋은 신앙은 현실을 누르지 않고 듣고 소통하는 신앙입니다.
3.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처럼 우리도 낮아짐으로 소통해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