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승수 목사님이 쓴 <핵심 감정> (세움북스 2019) 이란 책이 있습니다. 우리 삶을 움직이는 핵심 감정(뿌리가 되는 감정, 저자는 이 세 가지 뿌리의 감정으로부터 다양한 반응들이 나타난다고 말한다.)-두려움, 수치심, 분노-들을 돌아보고 그 감정이 아니라 복음(그리스도)으로 살아가도록 돕는 책입니다. 이 책의 서문을 읽던 중, "이 글이 우리 공동체가 공감모임을 할 때 좋은 가이드 라인이 되겠다"라는 마음이 들어 공유합니다.
제가 서문을 읽으며 공감모임에 함께 적용하고 싶은 것은 대화의 '피상성'이 우리 모임을 병들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피상성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은 '복음'이라는 것과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공감모임을 통해 함께 성장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란 사실입니다. 저는 우리교회가 함께 예배하고 함께 삶을 나누는 장면이 우리의 성화와 맞닿아 있다는 생각을 다시금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서문을 읽고 난 뒤, 여러분들의 생각도 매우 궁금합니다. 댓글을 통해 생각들을 나누어 주세요! 사랑합니다.
*글의 소제목은 제가 AI 를 사용해 임의로 정리해 붙인 것입니다. 참고해 주세요!
<핵심 감정> 서문 / 노승수 목사
요약 :
1. 믿음은 개인적인 것 같지만, 성경은 우리가 공동체 속에서 함께 자라간다고 말합니다.
2. 그런데 성경을 보면 공동체는 늘 완벽하지 않고, 오히려 실패와 갈등이 많은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3. 오늘날 교회도 바쁘고 지친 삶 속에서, 겉으로만 관계하고 깊이 나누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4. 진짜 변화는 서로의 마음과 아픔을 솔직히 나누고 이해할 때 일어나며, 이것이 공동체를 건강하게 만듭니다.
5. 결국 교회는 완벽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 아니라, 서로의 부족함 속에서도 함께 자라가는 ‘치유의 공동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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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화는 왜 공동체적인가?
보통 믿음은 개인적인 일로 이해가 된다. 실제로 독일의 개인주의는 루터 신학과 함께 발달했다. 그런데 성화는 공동체적으로 묘사된다. 실제로 신약성경은 인간의 거룩함과 관련하여서 성도라는 표현을 쓰는데 거룩할 ‘성(聖)’에 무리 ‘도(徒)’를 써서 개인이 아니라 거룩한 공동체를 묘사했다. 그럼 공동체로 있으면 우리는 성화하는가? 더 풀어서 설명하자면 공동체로 있으면 우리의 죄가 죽어지고 우리 안에 새사람이 소생하게 되는가? 실제로 공동체가 어떻게 기능하기에 우리는 공동체로 있으면서 그것을 기대할 수 있을까? 그럼 성경에서 그런 공동체적 치유나 성장 같은 코드를 예시를 통해서 찾을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그런 방식의 예시는 거의 찾을 수 없다. 예컨대, 우리가 갖는 통상적인 기대, 곧 행복하고 평안하고 만족스럽고 성장이 있고 변화와 감격이 있는 그런 공동체를 생각한다면 사실 성경에서 이런 예시는 희귀하다. 굳이 애써 찾는다면 오순절 예루살렘 공동체, 가나안에 갓 들어온 이스라엘 공동체, 요시야의 개혁 공동체, 포로 귀환 후 느헤미야 공동체 정도를 억지로 끼워 맞춰서 예시로 삼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성경의 역사에서 이런 예시를 왜 이렇게 찾기 어려운 걸까? 어디가 잘못되었을까?
2. 성경이 보여주는 공동체의 실패와 현실
그러면 성경에서 가장 많이 나타나는 사건 사고는 어떤 것일까? 그것은 공동체의 실패를 담은 교훈들이다. 가장 대표적인 책을 꼽자면, 사사기가 아닐까 한다. 사사기는 나선형 하강 곡선을 그리며 무너져 내리는 공동체의 사건을 담고 있다. 이런 예시들은 넘쳐난다. 애굽에 내려감으로 실수하는 아브라함과 그 공동체, 형제간에 반목하는 이삭의 자녀들, 야곱의 자녀들 등등 셀 수 없는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다. 성경은 성공의 이야기이기보다 실패의 이야기처럼 보인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루살렘에서 나눌 권력을 꿈꿨으나 예수님은 실패처럼 보이는 십자가를 선택하셨다. 그리고 그 십자가는 성부께서 계획하신 길이었으며, 우리의 죄를 없이할 길이었다. 이런 기본적인 사실을 교회 공동체에 적용한다면 교회 공동체는 어떤 곳이어야 할까? 사실 성경의 메시지를 이해는 하고 쉽게 동의는 하지만 다시 그것이 우리 공동체에 적용되어야 할 과제라고 생각하면 사실 막막하기만 하다. 교회 공동체는 십자가를 어떻게 구현하는 공동체여야 하나? 우리는 성경의 이야기처럼 우리의 비루한 삶을 교회 공동체에 드러내어야 하는가? 과연 그런 비루함과 비참을 드러내고도 우리 공동체는 유지될 수 있을까? 이런 질문들이 머릿속을 떠다닌다. 어느 누구도 힘든 갈등과 감정을 원하지 않는다. 누구나 성공의 느낌을 원하고 온정과 긍정의 감정을 원한다. 설혹 십자가를 필연으로 받아들이더라도 우리 삶이 냉혹한 광야이기만 해서는 견디기 어렵다. 때로는 엘림과 같은 오아시스가 신자의 삶에 있어야 그나마 지금의 삶을 견뎌 낼 수 있다(출 15:27).
3. 현대 사회의 소외와 한국 교회의 단면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만나는 현실의 교회는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다. 현대의 환경은 더 그렇다. 대부분의 도시인들은 분주한 삶을 살며, 자연과 사람들로부터 어느 정도의 소외를 겪고 있다. 그렇다고 농어촌 지역이라고 해서 자본주의적인 삶으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희구하면서 살기 쉽지 않다. 도시와 농촌 할 것 없이 우리는 각박하고 분주하며, 스트레스가 높은 환경에서 살고 있다. 그러니 교회가 되었든지 TV나 여가 문화가 되었든지 힐링과 자존감 같은 키워드가 자주 언급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도시와 자본은 인간을 인격적으로 대접하기보다 부속처럼 대우하는 경향이 있고 역설적이게도 근대를 루터(Luther)의 개인주의로부터 열었다면, 근대의 위기는 자본주의의 발달로 개인이 소외를 겪는 사회로 진입했다는 것이다. 소외는 인간을 소모하고 탕진하는 이 시대의 문화적 코드와 적지 않게 관련이 있고 그렇게 소모된 개인은 교회에서도 지난 반세기 동안 소모되는 존재로 치부되었다. 물론 귀한 헌신과 목회적인 돌봄이 있었음에도 한국 교회 안에서 이런 성화와 관련 없는 소모되는 삶이 만연했고 그런 피로감에 젖은 교인들은 가나안 성도가 되었다. 가나안 성도가 되지 않았더라도 대형교회에서 자신을 숨긴 채 신앙생활을 한다. 그런 교인들이 많아지면서 공동체로서 교회가 지녀야 할 형제 사랑은 점점 형식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한국 교회의 지난 세기 동안의 선교의 성장은 매우 고무적인 현상이지만 동시에 가까이 있는 교회의 지체들은 외면받으면서 머나먼 타국의 선교 현장에만 몰두하는 현상이 나타났고, 이런 현상은 우리 삶의 자리에서 사랑을 잃은 자들의 방황의 결과이자 삶의 균형점을 찾으려는 시도라고 봐야 한다. 그렇게 소모되고 소외된 인간은 교회에서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더 정직하자면 과연 교회 안의 교제가 교회 밖의 세속적 사람들의 교제와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을까? 물론 원리적으로는 우리가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맺은 관계와 그 연합이 우리 공동체의 구심점이자 형제 사랑의 원리라는 점은 진리이지만 우리 삶의 자리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앞서 언급한 교회 성장의 열정을 보인 여성들의 가정에서의 삶은 가정을 믿음으로 이끄는 놀라운 신앙의 저력을 보이기도 했지만 오히려 남편들을 교회로부터 더 멀어지게도 했었다. 결국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세상과 적절한 소통을 이루는 데 실패한 모습이 한국 교회의 여성들을 중심한 교회 성장의 한 단면이다.
4. 영적 허기를 채우는 프로그램과 피상적 교제
그러면 교회 안의 소통과 교제에 적절한 정도의 밀도와 사랑의 나눔이 있을까? 주일 공예배 후, 점심식사를 하면서 나누는 다소간의 담소, 그리고 2~3시쯤 오후 예배를 드리고는 가정으로 돌아가는 게 대부분의 현실이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 프로그램을 통해서 소모되고 소외된 자기를 채우는 형태의 영적인 장터에서 자신이 지닌 정서적이며 영적인 허기를 허겁지겁 채우는 프로그램들로 채워진다. 다소 자기애적인 이 과정들은 자기 만족을 추구할 뿐 공동체적 관계를 촉진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왜냐하면 상호관계를 촉진하는 시간은 거의 없고 대부분의 시간들이 영적 필요에 대한 강의나 자기 계발과 성장들로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나는 성경공부도 이런 형편에 놓였다는 생각이 드는데 대부분의 성경공부들이 복음과 회심을 중심으로 이뤄져 있지 않고 성경의 지식들의 나열이나 지적 욕구를 채우는 것으로 구성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나마 이런 교회 환경에 놓였다면 행운이라 할 수 있다. 대부분의 교회들은 교회에서 이뤄지는 여러 행사들로 세상에서도 지치고 교회에서도 지친다. 특히나 청년들의 형편은 새벽부터 저녁까지 그들의 영적인 필요는 거의 공급되지 못한 채 장년들이 해야 할 일들의 뒤치다꺼리를 하는 소모적 시간들로 주일이 채워진다. 그러나 청년들의 실제적 필요는 사실상 참된 교제이며, 그 교제를 통해서 의미 있는 만남을 맺는 것이다. 이 부분은 장년도 크게 다르지 않다. 교회 내에서 이뤄지는 대화의 내용을 보면, 그 주간 세상에서 있었던 사건 사고에 대한 대화, 그날의 날씨, 자녀 교육에 대한 정보, 심지어 경제와 정치 이야기, 부동산에 대한 이야기 등등의 삶의 여러 정황들에 대한 이야기가 오고 가지만 그들이 영적으로 어떤 형편에 처했는지 혹은 자신의 내면이 어떤 상태인지를 나누는 대화는 거의 없다.
5. 소통의 부재와 '핵심감정'의 필요성
심지어 영적인 대화가 오가는 중에도 바벨탑 사건과 같은 불통은 계속해서 일어난다. 영적인 대화를 한참 나누던 석현 형제는 가정에서 가장으로서 자신이 수고한 것에 비해 아내가 자신의 수고를 제대로 인정해 주지 않는 것에 대해 속상함을 공동체에서 토로한다. 곁에 있던 몇몇 형제들의 지지에 대해 석현 형제는 “제 아내에게 그 말을 꼭 전해 주세요”라고 화답한다. 농담처럼 내뱉은 말이지만 아내와 소통하고 싶은 열망과 그런 열망과 달리 제대로 소통할 수 없는 마음이 그렇게 표현이 되었다. 그 이야기를 듣던 성숙 권사님은 석현 형제에게 그의 아내에 대해 칭찬을 늘어놓는다. 얼마나 성실하고 좋은 사람이냐고 하는 이런 표현들은 상대가 드러낸 영적인 현실을 쉽게 덮어버리고 만다. 예컨대, 핵심감정 두려움의 사례 중 하나였던 유미 씨의 공포반응에 대해서 교회의 지체들이 그녀에게 했던 “믿음이 좋으니까”라는 말은 격려가 아니라 그녀의 증상을 키우는 반응이었다. 결국 믿음에서 멀어지게 만드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기름때가 묻은 옷의 기름때를 빼려면 기름기가 필요하듯이 두 사람 사이의 소통이 일어나려면 현재의 상황에 대한 인정과 수용이 필요하지만 우리는 너무 쉽게 믿음과 긍정으로 옮겨 가면서 상대가 처한 현실을 덮어버리고 만다. 이런 일을 반복적으로 겪게 되면 부부는 정서적인 별거를 경험하게 되고 성도는 교회에서 더 이상 영적 대화를 시도하지 않게 된다. 왜 우리는 교회에서 이런 대화를 기피하게 되었을까? 왜 부부가 자신의 삶을 나누는 것을 기피하게 될까? 이런 대화는 갈등만 키울 뿐 아무런 효과를 내지 못하고 생채기만 내었던 이전의 경험이 누적적으로 있기 때문이다. 이런 갈등을 제대로 다루는 기술이 없고 이것을 해결하는 게임의 법칙이 없기 때문이다. 어떤 스포츠든지 경기가 재미있으려면 선수들의 활동을 크게 해치지 않으면서 상호간에 인정할 만한 게임의 법칙이 존재해야 한다. 리시브는 하지 않고 서브만 하는 테니스 시합이 흥미가 있겠는가? 핵심감정은 공동체가 서로 더 가까워질 수 있는 게임의 법칙과 같다. 힘든 감정을 효과적으로 다루게 해 줄 뿐 아니라 신자가 자기 한계를 넘어서 영적인 성장을 할 수 있도록 자기를 이해하고 표현하고 수용하고 주님께 맡길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이런 이해의 지평이 타인을 이해하는 지평도 확장시키며 결국 관계의 어려움을 견뎌내는 내적인 힘도 함께 키우게 된다.
6. 결론: 공동체적 성화의 현장성
이러한 서로에 대한 이해와 용납은 개인적인 기도와 성경 묵상만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기도와 말씀은 은혜의 방편이다. 이 말은 우리의 영적 양식이라는 말이다. 가정에서 엄마가 해 주는 밥을 먹은 아이는 아무 경험 없이 밥만 먹고 자라는 것이 아니라 가정이라는 울타리의 보호와 지도 속에서 수많은 시행착오의 경험을 통해서 자라간다. 교부 키프리아누스(Cyprianus) 때부터 고백해 온 교회를 어머니라고 말하는 진짜 의미이기도 하다. 교회는 영적인 밥을 먹는 장이기도 해야 하지만 우리 영적 근력과 정서, 사회성이 발달하는 장이기도 해야 한다. 성화가 교회 공동체로부터 일어난다는 것은 이런 의미이다. 동시에 이런 교회 공동체의 장이 병원 같은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교회는 이미 거룩해진 무리의 모임이기도 하지만 거룩하게 지어져 가는 공동체이기도 하다. 당연히 성경 전체에 나타나 보이는 사건 사고가 많은 교회 공동체의 어수선함은 오늘 우리 교회의 현장을 그대로 드러내 보여 주는 것이다. 교회는 쓰레기더미에서 핀 장미꽃 같은 것이다. 이 현장성을 떠나서는 진정한 의미의 성화를 기대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