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출처 Unsplas, 작가 Ismael Paramo]
[컴그아침묵상] 3월 9일
[본문말씀]
고린도전서 2장 1-5절
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3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4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5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묵상]
오늘 본문을 가만 보면, 바울의 모습이 우리가 아는(?) 바울이 아닌 것만 같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바울은 탁월한 논리와 뛰어난 웅변으로 하나님의 복음을 전했을 것 같은데, 본문에서 바울이 말하는 바울의 모습은 이러한 상상과는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복음 사역에 대해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하지 않았다”라고 말하고, 고린도가 추구하는 지혜와 표적과는 전혀 다른 “십자가”를 전했으며, 무엇보다 그는 위풍당당한 모습이 아니라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약하며, 두려워하고 심히 떠는 모습”이었다고 말합니다. 바울이 오늘 본문을 통해 스스로에 대해 말하는 이 장면은 우리가 생각하는 바울의 일반과는 전혀 다릅니다.
우리의 생각과 전혀 다른 바울의 모습을 보며, 한 가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바울의 초라한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복음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아마도 제 생각에 바울이 스스로를 말하는 자신의 모습을 볼 때에, 고린도 사람들에게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설득력 없는 이야기였을 것 같습니다. 가장 먼저는 그 복음을 전하는 바울이 그렇게 매력적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보통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을 보고, 그 복음을 생각할 텐데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바울의 모습은 연약하기 그지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실제로 고린도후서 10장을 보면, 고린도에서 바울에 대한 평가는 ‘글에는 능하나, 말이 시원하지 않다’였기에 바울은 그들에게 설득력 있거나 매력적인 존재는 아니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이상하리만큼 자신의 매력없는 모습에 주눅들지 않고, 오히려 더 당당하게 자신이 전한 복음이 말과 지혜에 있지 않으며 도리어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에 있다”고 말합니다.
아마도 바울이 이렇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바울이 주목한 대상이 십자가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십자가야 말로 바로 바울보다 더 연약했고, 보잘것없었으며 더 나아가 사람들을 설득할 수 없는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그 십자가를 자신의 사랑이자, 자신의 능력으로 나타내셨습니다.
당시에 분명 바울도 여러 유혹들을 받았을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매력적이지 않은 그 십자가가 아니라, 네 자신의 탁월함을 의지해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복음을 전할 것에 대해서 말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고린도전서 서두에서 유독 십자가를 강조함으로써 그들이 가진 기독교에 대한 오해들을 재교정 해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독교신앙에 대해 우리가 가질 수 있는 흔한 오해는 바로 기독교신앙을 사람들을 단번에 설득해 내는 ‘능력’으로 오해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를 고린도전서에서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들은 지혜를 구한다”라고 말합니다. 당시 고린도에서는 예수를 믿으면 대단한 표적을 얻을 수 있고, 예수를 믿으면 지혜를 얻게 된다는 말이 설득력 있는 메세지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십자가는 오히려 이 둘을 거스르는 내용들이었습니다. 그 표적과 지혜와 같은 능력과 별개로 오히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죽는 것’이 전부였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이 말입니다! 그러니 그들에게 십자가는 거리끼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이 세상이 설득될 수 있는 결과를 보여달라고 합니다. 예수를 믿어 ‘돈’이란 능력을 얻게 되었는지, 예수를 믿어 사회적인 ‘지위’를 얻게 되었는지 말입니다. 흔히 일반적으로 ‘이러한 사회적인 결과를 얻은 사람들이 복음을 전하면 그 복음이 더 설득력 있는 복음이 되지 않겠느냐’고도 말합니다. 하지만, 여러분 이는 기독교신앙을 오해한 것입니다. 기독교신앙은 결코 그러한 장면에서 증명되지도, 증명하려고 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보며 “네가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거기서 뛰어 내리라, 그러면 믿겠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내가 얼마나 큰 능력이 있는가로, 내가 하나님임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너희를 위해 얼마나 더 연약해질 수 있는지를 통해 내가 어떠한 하나님인지를 말하겠다”라고 말입니다.
그분은 자신의 능력을 뽐내는 것으로 자신이 누구이신지를 우리들에게 말씀하시는 분이 아니라, 도리어 우리를 위해 얼마나 연약해질 수 있으신지를 통해 자신이 어떠한 하나님이신지를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때문에 바울 역시도 자신이 연약해지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조금 말이 시원하지 않더라도 개의치 않습니다. 기독교신앙은 자신의 능력을 증명함으로써 하나님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루를 살며 설령 우리가 하나님을 위한 충분한 결과를 갖고 있지 않는 것 같아 보일지라도 괜찮습니다. 그분이 자신을 증명하시며 우리를 증명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수치와 모욕을 짊어지시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분이 스스로의 강함을 증명함으로써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얼마나 더 연약해질 수 있는지를 통해 우리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도 우리의 연약함을 두려워하지 않고 도리어 우리를 위해 한없이 약해지신 그분 안에서 그 연약함들을 얼마든지 마주할 수 있습니다. 이는 그분의 강함을 누리며 살아가는 비밀이기도 합니다. 부디 우리 존귀한 성도님들께서 그분의 강함을 마음껏 누리고 맛보는 하루를 살아가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사랑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날마다 강해져야만 할 것 같고 결과로서 복음을 증명해내야 할 것만 같은 세상에서 도리어 우리를 위해 한없이 약해지시기로 작정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더욱 주목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 십자가가 우리의 자랑이 되어 이 세상에서 우리의 강함을 통해 안정감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연약함 안에서 강함을 누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서울특별시 강남구 자곡로 191, 상가 3호 커먼그라운드교회 (우편번호 06372) | cgc@cgc.or.kr
©COPYRIGHTS 2022 COMMON GROUND PRESBYTERIAN CHURCH. ALL RIGHTS RESERVED.
서울특별시 강남구 자곡로 191, 상가 3호 커먼그라운드교회 (우편번호 06372) | cgc@cgc.or.kr
©COPYRIGHTS 2022 COMMON GROUND PRESBYTERIAN CHURCH.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