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부터 끝까지 마음이 저릿, 고통스러웠습니다.
인생에서 참 사연이 많은 사람이라 자부하고 살았던 것 같은데, 돌아보니 인생에서 과식으로 인한, 무거운 몸으로 인대들의 비명 말고는 아토피라든지, 불면이라든지, 크고 작은 병 혹은 사고들로 아파본 적이 없었음을 깨닫습니다. 특히나 자기중심적인 저는 공감 부적응자로 살아왔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근래 죽음의 장면들을 자주 마주하게 됩니다. 동생의 교통사고, 주변인들의 투병 생활, 그리고 미무라 목사님의 소천까지. 멀리만 느껴지던 죽음이란 게 생각보다 가까이 있었음을, 그리고 곧 그게 나를 향하고 있음을 봅니다. 죽음을 조우하니 정체 모를 우울감이 저를 덮습니다. 고통과 죽음이 그동안은 내 이야기가 아니라 외면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고통이란 것을 죽음이란 것을 이렇게나 가까이에서 본 적이 있나 싶기도 합니다. 문장 하나하나가 마치 절규와 같이 느껴집니다.
누군가의 사고, 병, 죽음을 보며 그럴 만한, 그럴싸한 이유를 찾곤 합니다. 또 그러한 상황에 처한 이들을 들여다보면 이성적으로 인과관계가 이루어지길 바라기도 합니다. 저 또한 그러한 사람 중에 하나라고 자부합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전혀 그럴 만한 이유가 없는 경우들도 보곤 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고백하면서도 이해하지 못함에서 오는 원망을 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이 모든 것을 이해하지 못하겠나이다. 이해를 넘어서는 주의 평안을 내게 주소서. 꽤나 오랜 고통과의 씨름 가운데, 어쩌면 이해를 포기한, 나됨을 포기한 고백일련지요.
사실 근래 미무라 목사님(관련 글 읽기) 소천 전에 관련된 꿈을 꾸었습니다. 미무라 목사님 이름만 읊었을 뿐인데, 꿈속에서 꽤나 오랫동안 울었습니다. 일어나서는 굳이 꿈 해몽이라든지, 의미 부여를 하지 않기 위해 애쓰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기도하지 않는 저를 꾸짖으시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2~3일 후에 소천 소식을 듣습니다. 기도하지 않은 제가 참 부끄럽고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은 욕구를 느낍니다. 또 이내 나의 기도로 그의 병에 큰 도움이 안 될 거란 생각에 미처 생각을 그쳤던 것 같습니다.
책을 보며, 새삼 깨닫게 된 것은 생과 사는 하나님께서 주관하실지언데, 그 기도가 병상에 있는 자에게, 가족이나 함께하는 이들에게 또 기도하는 자에게 건내는 평안과 사랑이란 걸 깨닫게 됩니다. 여전히 누군가를 위해 기도한다는 게 어색하면서도 죄책감과 부채감으로부터 자유함과 사랑을 발견하게 됩니다. 죽음이란 게 여전히 무겁고 어렵고 힘듭니다. 과연 내가 마주할 용기가 있을까 싶기도 합니다.
제 안에 교만함과 이웃을 사랑하지 못함을 깨닫게 하심에 감사합니다.
[전12:1]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