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그아침묵상] 4월 5일
[본문말씀]
마태복음 26장 14-16절
14 그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말하되
15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 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16 그가 그 때부터 예수를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묵상]
우리가 익히 아는 것 처럼 예수님은 자신의 제자 중 하나인 가룟 유다로부터 배신을 당하십니다. 가룟 유다는 열심당원이었는데, 당시 로마의 통치를 물리적인 노력과 열심으로 극복하고자 했던 정치집단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었습니다. 가룟 유다가 믿고 바랐던 메시아는 열심당원들이 가진 소망을 이루어 줄 수 있는 메시아였습니다. 드디어 예루살렘에 입성했습니다. 이제 가룟 유다가 바라는 정치적인 해방이 예수님을 통해 일어날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기대와는 달리 오히려 예수님은 자신이 ‘고난 받고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가룟 유다는 점차 예수님을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믿음이 흔들렸습니다. 로마로부터의 해방될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가 깨지자, 예수님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그렇게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기로 작정하고 유대 종교지도자들을 찾아가 예수님을 두고 거래를 합니다.
은 삼십. 유다와 대제사장들이 예수님에 대해 매긴 값입니다. 은 삼십에 예수님은 거래 당하셨습니다. 구약에서 은 삼십은 짐승에게 희생을 당한 ‘종’에 대한 값이었습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볼 때, 예수님은 ‘종’의 값으로 거래 되신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유다와 대제사장 간에 합의된 이 금액으로 볼 때, 분명한 것은 예수님의 몸값이 그렇게 높게 평가 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은 삼십이란 수치는 그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는 또 다른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 거래를 당하신 장면은 한 사람에게 가해질 수 있는 굉장한 상처입니다. 왜냐하면, 인격은 사고 팔고 할 수 있는 상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하나의 상품과 같이 -그것도 아주 저렴한 값으로- 거래 당하셨습니다. 이렇게 거래 당하신 예수님을 볼 때, ‘어떻게 이렇게까지 무능해지셨는가’ 의문을 갖게 됩니다.
유다에게 예수님의 무능함을 팔아야 하는 이유가 되었듯이 우리가 사는 시대는 무능하면 가치가 없다고 여기는 시대입니다. 능력이 곧 자신의 가치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를 모를리 없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사람의 몸을 입고 찾아오셨을 때 그분은 무능한 하나님으로 우리 곁으로 오셨습니다. 왜 이렇게 무능한 하나님으로 오신 것일까요?
왜냐하면 모든 능력의 원천이신 예수님께서 우리가 무능해 당해야할 모든 결과를 받기로 결정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무능해지신 것은 우리의 무능함을 그분이 담당하신 것입니다. 그분이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무능해, 거래를 당하신 것은 우리가 죄를 지어, 죄에 대해 무능해 넘겨진 우리를 대신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이 우리를 대신하여 무능해지시고 거래 당하신 그분의 고난이 우리의 자랑이 됩니다. 과연 누가 우리를 위해 이렇게까지 기꺼이 낮아지며, 무능해지며 우리를 대신해 거래 되어 넘겨지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우리가 믿는 기독교신앙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했느냐’가 아니라, ‘그분이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을 보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고난주간 우리를 위해 기꺼이 무능해지셨으며 약해지셨으며 거래의 수단이 되신 예수님을 바라 보시기 바랍니다. 그분 앞에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삶을 그분이 우리를 위해 걸으신 길 안에서 바라 볼 수 있기를 구하십시다. 이러한 바람들이 고난주간을 걷는 우리들의 담대함이 됩니다. 사랑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위해 기꺼이 무능해지신 예수님을 자랑하게 하옵소서. 이렇게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 안에서 아버지와의 관계를 누리게 하옵소서. 하지 못해서 눌리는 신앙이 아니라, 도리어 우리를 위해 행하신 하나님을 바라며 즐거워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