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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림학교 이야기

감정적 체험이 믿음의 증거가 될 수 있을까? 첫 번째 소극적 표지(193-198)

by 명도사님 · 2026.10.14.
사진: Unsplash의 Mayank Dhanawade

결론부터 말하자면, '감정적 체험'만으로는 믿음이 없다고 할 수도 없고, 참된 믿음의 증거라고 할 수도 없다.

감정적인 체험을 대하는 양 극단의 사람들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감정적 체험이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 때 이상하게 여기며 정죄를 한다.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특별한 감정적인 체험을 보면 그것이야말로 믿음의 증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둘 다 성경에서 지지받지 못하는 견해이다.

먼저, 감정을 부정적으로 여기고 정죄하는 것은 성경적인 견해가 아니다. 성경에는 다양한 신앙으로 인한 감정들이 나오기 때문이다. 사랑, 죄를 미워함, 하나님께 대한 감사, 거룩에 대한 갈망과 같은 감정들은 믿음으로부터 오는 감정들이다. 에드워즈는 이러한 감정들을 크게 느끼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임을 지적한다. 성경에서는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는 것을 말씀하면서 크고 높이 고양된 감정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194)

"그러나 의인들은 기뻐하여 하나님 앞에서 뛰놀며 기뻐하고 즐거워할지어다"(시편68:3)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5:12)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그들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눅6:23)

위 구절들을 보면, 성경은 도리어 성도에게 매우 높이 고양된 감정을 품도록 요구한다.(194) 그리고 성경에는 성도들의 고양된 감정이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말할 수 없는 사랑을 표현한 말씀도 있다.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작은 소리로 읊조리나이다”(시편119:97) 반대로 죄에 대한 말할 수 없는 미움을 표현한 말씀도 있다. "여호와여 내가 주를 미워하는 자들을 미워하지 아니하오며 주를 치러 일어나는 자들을 미워하지 아니하나이까 내가 그들을 심히 미워하니 그들은 나의 원수들이니이다"(시139:21-22) 자신의 죄로 인한 깊은 고통을 표현하는 말씀들은 자주 기록되어 있다. 다른 사람의 죄악을 슬퍼하기도 한다. “그들이 주의 법을 지키지 아니하므로 내 눈물이 시냇물 같이 흐르나이다”(시119:136) 또한 기쁨을 표현하는 말씀들도 있다. “여호와여 왕이 주의 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주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크게 즐거워하리이다”(시21:1) “내가 주를 찬양할 때에 나의 입술이 기뻐 외치며 주께서 속량하신 내 영혼이 즐거워하리이다”(시71:23)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이러므로 나의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의 손을 들리이다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나의 영혼이 만족할 것이라 나의 입이 기쁜 입술로 주를 찬송하되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새벽에 주의 말씀을 작은 소리로 읊조릴 때에 하오리니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겁게 부르리이다"(시63:3-7)

신약 성경에서도 신앙 감정은 자주 찾아볼 수 있다. 사도 바울은 감정 체험을 자주 표현한다. 그는 다른 사람을 위한 동정심과 관심을 자주 표현하고, 그로 인한 고통도 자주 표현한다. 뿐만 아니라, 환희와 승리, 간절한 기대와 소망, 풍성한 눈물, 영혼의 고통, 긍휼의 마음, 슬픔, 갈망, 경건한 질투심, 불타는 열정을 말하기도 한다. 예수님의 시신에 기름을 바르려고 했던 여인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빨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달음질할새”(마28:8)

성경에서는 장차 교회가 크게 기뻐할 것이라는 예언도 자주 기록되어 있다. "즐겁게 소리칠 줄 아는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여 그들이 주의 얼굴 빛 안에서 다니리로다 그들은 종일 주의 이름 때문에 기뻐하며 주의 공의로 말미암아 높아지오니"(시89:15-16)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슥9:9) 또한 그리스도의 복음은 큰 기쁨이라는 감정을 열매로 맺기 때문에, 천사는 복음을 '온 백성에게 미칠 기쁨의 좋은 소식'(눅2:10)이라고 불렀다.

이처럼 에드워즈는 감정이 크게 감화되고 고양되는 것은 은혜의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말한다. 하나님을 묵상할 때 천국에 있는 성도와 천사들도 감정적으로 크게 감화될 것이기 때문이다.(196) 이처럼, 신앙 감정을 크게 느낀다고 거짓된 믿음으로 치부하는 것은 잘못된 견해이다.

하지만, 신앙 감정이 크게 고양되었다는 사실이 우리 안에 있는 믿음을 참되다고 입증해줄 수도 없다. 다시 말해, 신앙 감정의 고조는 은혜로 인한 것일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성경에는 감정적으로는 크게 감화되었지만, 구원에 이르지 못한 사람들도 등장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갈라디아인들 중에는 감정이 고조되었지만 결국 헛것이고 열매 맺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다.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언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라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갈 4:15) 이스라엘 백성들도 홍해에서 큰 기적을 맛보고, 크게 감화되어 하나님을 찬송했지만, 금세 하나님의 일을 잊었다. 시내산에서도 하나님의 임재 앞에 두려워 떨었지만, 금세 금송아지를 만들어 언약을 깨뜨렸다. 신약에서도 위와 같은 사례는 등장한다. 나사로의 부활을 본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찬송하며 소리쳤지만(요12:18), 무리 중에 참된 제자들은 소수에 불과했다. 예수님을 향해 '호산나'를 외치던 소리는 머잖아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외침으로 변해버렸다. 이처럼, 신앙 감정이 매우 높게 고양된다고 해도, 참된 신앙과 무관할 수 있다.(198)

글을 정리하며

오늘날 우리는 이성과 과학의 시대에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이성과 과학은 우리에게 유토피아를 건설해주지 못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이러니하게도 비이성적인 것들과 초자연적인 것들에 더 주목한다. 그래서 오늘날 과학은 고도로 발달되었지만 마약과 미신이 흥왕하는 것이다. 에드워즈의 첫 번째 표지는 사단이 교회를 분열시키기 위해 심는 가라지이자 모조품 중 하나이다. 특별히 오늘날처럼 이성적인 사고와 비이성적인 삶이 공존하는 시대에 잘 통하는 모조품이다. 성도는 세상을 살아가기 때문에, 결코 영향을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교회에는 이성적인 견해를 가진 성도와 초자연적인 견해를 가진 성도가 공존하는 것이다. 그러나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사실은 우리는 모두 성도라는 것이다. 그리고 참된 성도 안에 다양성이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설교를 들으면 눈물을 흘린다. 어떤 이는 기도 시간에 방언을 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통곡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일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마치 '그것이 알고 싶다'에 나오는 사이비와 같아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의 감정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는 하나님의 말씀"(히 4:12)으로 인한 것이라면, 말씀 앞에 비춰진 나의 죄로 인해 눈물을 흘리고 감격하는 모습은 자연스러운 모습이 아닐까?

하지만 감정을 지나치게 과신하는 태도도 경계해야 한다. 필자도 한때 감정이 고조되는 것을 선망했던 적이 있다. 감정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은 눈물이다. 눈물을 통해 나의 감정이 드러나면, 나의 참된 신앙에 증거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교회 면접 자리에서 눈물이 나길 바라기도 했고, 설교단에서도 눈물을 흘리기를 은근히 소망했다. 하지만, 눈물이나 감정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그리스도를 말하며 눈물을 흘려도 그것이 나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면 금송아지와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 웃으면서 설교를 해도 이것이 나를 사랑하신 그리스도로 인한 기쁨에서 나오는 열매가 아니라면, 그저 '내가 이토록 그리스도를 누립니다'라는 모조품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신앙은 불과 같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에 성령을 보내신다. 성령은 끊임없이 우리의 마음에 은혜라는 불을 지피신다. 은혜는 꺼지지 않는다. 우리는 평생 온기를 누리고, 평생 변화되어 간다. 하지만 거짓된 은혜는 쉽게 꺼진다. 성령께서 안에 계시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참된 은혜보다 더 뜨겁게 타오를 때도 있다. 하지만 은혜라는 연료가 없기 때문에 불은 언젠가 꺼지고 만다. 위선자는 이 불을 꺼뜨리지 않으려 경쟁, 시기, 질투와 같은 연료로 은혜를 대체하고자 한다. 하지만 결국 불은 식어지고 집은 무너지고 만다.

주님, 우리의 신앙이 한때의 추억으로 남지 않게 하소서. 한순간 타오르고 마는 신앙이 되지 않게 하소서. 눈에 띄지 않는 신앙일지라도 마지막까지 꺼지지 않는 참된 신앙을 우리에게 주소서. 다른 것으로 동력 삼지 않고, 오직 말씀 가운데 주시는 주의 은혜로 살아가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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