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시작하며
기독교와 다른 종교의 가장 근본적인 차이는 '살아 계신 하나님'이다. 기독교에는 '살아 계신 하나님'이 계시고, 다른 종교에는 하나님이 없기 때문이다. 다른 종교에서 섬기는 신을 성경은 '우상'이라고 한다. 시편 115편 4-8절은 우상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준다.
“그들의 우상들은 은과 금이요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이라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코가 있어도 냄새 맡지 못하며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그의 목구멍으로는 작은 소리도 내지 못하느니라
우상들을 만드는 자들과 그것을 의지하는 자들이 다 그와 같으리로다”
(시편 115:4-8)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없다. 우상처럼 무감각해져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복음의 원리가 도저히 이해될 수 없는 것이다. ‘살아 계신 하나님’이라는 근본적인 원리, 즉 복음의 원리가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회를 다니면서도 복음의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오늘은 간단히 복음의 원리에 대해 소개해 보고자 한다.
다른 종교나 기독교나 비슷해 보이는 것도 있다. 대표적으로 '죄', '구원', '도덕적인 삶'을 말한다는 것이다.
1. 죄에 대하여
모든 종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다른 종교들 가운데에도 죄를 인정하는 경우가 있다. 인간에게 악이 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이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어쩌다가 죄인이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반면 기독교는 인간이 처음 지음 받았을 때부터 악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타락의 시작점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사건’이었다고 명확하게 제시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죄의 본질이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불순종’이라는 사실도 알 수 있다.
2. 구원에 대하여
다음으로 구원에 대해서, 많은 종교는 ‘죄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제시한다. 하지만 살아 계신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인간이 가진 무언가를 힘입어 죄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말한다. 곧 지성을 활용해 죄를 깨닫고, 정서를 통해 죄를 미워하며, 의지를 통해 죄를 끊어 내는 것이다.
반면 기독교는 인간 스스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고 단언한다. 인간에게 지성과 정서와 의지가 남아 있기는 하지만, 죄의 영향으로 인해 온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온전하지 못한 상태를 ‘부패’, 혹은 ‘오염’이라고 한다. 부패한 지성은 하나님을 찾을 수 없고, 부패한 정서는 하나님을 미워하며, 부패한 의지는 옳은 것을 알아도 행할 능력이 없다. 이처럼 타락한 인간은 구원에 대해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며, 외부의 도움을 간절히 구해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죄인의 상태를 단순한 ‘환자’가 아니라 ‘시체’에 비유한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요 11:1-16)은 이 사실을 가장 잘 보여준다. 죄인의 상태는 죽어서 썩은 냄새만 진동하던 나사로의 상태와 같다. 그가 다시 살아나기 위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는가? 그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찾아오시기를 기다릴 뿐이다.

렘브란트, 「나사로의 부활」, 1630-1632, 패널에 유화, 96.36×81.28cm,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박물관, 로스앤젤레스
3. 도덕적인 삶에 대하여
다른 종교나 기독교나 표면적으로 보면 이전보다 더 개선된 ‘도덕적인 삶’을 추구한다. 내세에서의 구원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도덕적인 삶을 추구한다. 그리고 내세에서 누릴 구원과 현세에서의 도덕적인 삶 사이에는 연속성이 있다.
다른 종교에서는 도덕적인 삶을 구원에 이르는 방편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 선행을 하고 덕을 쌓으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물론 선행에 대한 정의는 종교마다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선행이 먼저이고 구원이 나중'이라는 순서는 대부분 공통점을 보인다.
우리가 선행을 하기 위해서는 지성과 정서와 의지가 필요하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 세 영역은 모두 부패해 버렸다. 그중에서도 특히 부패한 것은 정서와 의지이다. 성경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렘 17:9)라고 말씀한다.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깨달음을 얻고도 그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머리로 하나님의 법을 알고 깨달아도, 마음이 그것을 기뻐하지 않고, 의지도 생겨나지 않기 때문이다.
서두에서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가장 근본적인 차이는 ‘살아 계신 하나님’이라고 말했다. 이 전제가 모든 것을 뒤집는다. 성경은 선행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행하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 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히 13:16)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골 1:10)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을 알 수 없고, 하나님을 기뻐할 수도 없으며, 하나님을 위해 살아갈 수도 없다. 이 모든 일을 가능하게 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 하나님’이시다.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께서 죽은 우리의 심령을 살리신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지성과 정서와 의지가 새롭게 된다. 거듭난 지성은 하나님과 그분의 뜻을 알고 깨닫게 된다. 거듭난 정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즐거워하게 된다. 거듭난 의지는 하나님을 위해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된다. 성령께서는 무엇보다 우리의 선행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일이 되게 하신다. 왜냐하면 성령께서는 우리를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요 16:13-1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앞서 언급했듯이 선행이 구원을 이루는 근거가 되지는 못한다. 죽어 있던 시체를 살리신 분은 오직 성령 하나님의 능력이시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도 거듭나기 전에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만한 선행을 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선행은 구원받은 자의 증거가 된다. 또한 감사와 기쁨으로 살아가게 하는 동력이 된다. 그리고 더 나은 삶을 기대하게 하는 소망이 된다. 곧 내가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는 매일의 증거인 것이다.
글을 마치며
성경은 우리 안에 선한 것이 없다고 말한다. 만일 우리에게서 선한 것을 발견하게 된다면, 그것이 성령의 역사임을 유념해야 한다.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을 통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고백할 수 있으며,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 가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 또한 이것은 우리의 매우 중요한 기도 제목이 된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통해 일하시기 때문이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리셨듯이, 아직 거듭나지 않은 자들도 살려 주시기를 간구해야 한다. 또한 성령 하나님께서 거듭난 자들이 능력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간구해야 한다.
성령께서는 이미 거듭난 자에게 많은 은혜를 주셨다. 그리고 주신 은혜를 잘 활용하는 것은 거듭난 자의 특권이자 의무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더 이상 죽은 시체의 상태에 머물러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지금의 상태는 태초에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었던 아담 보다 더욱 복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이제는 성령 하나님께서 항상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를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