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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림학교 이야기

몸의 격렬한 반응이 믿음의 증거가 될 수 있을까? 두 번째 소극적 표지(199-204)

by 명도사님 · 2026.10.21.
사진: Unsplash의 Mic Narra

뉴스에 교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반가움보다는 걱정이 앞선다. 주로 좋은 소식보다는 안 좋은 소식이 주를 이루기 때문이다. 안타까운 것은 명칭은 교회이나 실상 우리가 교회로 인정하지 않는 곳조차 교회라는 이름으로 소개된다는 것이다.

교회가 미디어에 부정적으로 묘사될 때 자주 등장하는 장면은 신도들이 격렬하게 몸에 반응을 일으키는 모습이다. 필자는 사실 어릴 때 그런 모습을 보면서 자라왔다. 개혁주의 전통의 장로회 교회에서는 그런 일을 보는 것이 쉽지 않다. 하지만 군에 입대하기 전까지 있던 교회는 수요일과 금요일 예배 때마다 그런 일이 흔했다. 모든 성도가 통성과 방언으로 기도를 했고, 박수를 치거나, 소리 내 울거나, 심지어 자리를 이탈해 뛰며 무아지경에 빠진 듯한 모습을 보기도 했다. 어린 날에 그런 광경을 보는 것이 계속 봐 왔기 때문에 익숙하면서도 여전히 낯설었다.

'몸의 격렬한 반응'에 대한 입장은 모두 다를 것이다. 뉴스와 시사 프로그램의 영향 때문인지, 아니면 내가 속한 교단의 특성 때문인지, 최근에 그런 일을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몸의 격렬한 반응'에 대한 낯설기만 하고 부정적으로만 느껴진다. 그렇다면 조나단 에드워즈가 그의 저서에서 밝힌 입장은 무엇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몸의 격렬한 반응'만으로는 믿음이 없다고 할 수도 없고, 참된 믿음의 증거라고 할 수도 없다. 우선 몸의 격렬한 반응을 부정할 수 없는 이유가 있다. 먼저 인간은 영혼과 육체가 연합된 전인이다. 그래서 육체와 영혼은 서로 영향을 준다. 그래서 영혼에 미치는 영향이 육체적으로도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본질적으로 연약한 존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감동될 때 심지어는 쓰러질 수도 있는 것이다.(200)

성경에서도 강렬한 신앙 감정이 일어난 일들을 기록하고 있다.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시84:2)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시63:1) 두 구절은 신앙 감정이 영혼뿐만 아니라 육체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증거한다. 하박국 선지자도 하나님의 위엄에 압도되었을 때 육체에 미친 영향을 증거한다(합 3:16). 하나님이 위엄을 드러내실 때 다니엘 선지자는 다리가 풀렸고(단 10:8), 사도 요한은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었다(계 1:17)고 증언한다. 이처럼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 앞에서 감정이 고조되고 육신에도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하지만 육체에 특별한 반응을 일으킬 정도의 감정이 믿음의 증거가 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신앙과 관련이 없는 감정에도 몸은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러한 일들을 통해 마귀는 우리를 기만하기도 한다. 특별히 신앙생활에서 불만족스러울 때 그 유혹에 빠져들기 쉽다.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 다른 사람들보다 특별해지고 싶은 마음 때문에 특별한 일을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나의 어릴 적이 그러했다. 앞서 이야기했듯 나는 어려서 감정으로 인해 육체적으로 압도되는 어른들을 보며 자라왔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어렸을 적 어른들이 해준 꿈과 환상에 대한 이야기는 내게 혼란을 야기했다. 그런 것들을 전혀 경험하지 못하는 나로서는 내가 구원받은 신자가 맞는지 의심하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에드워즈의 말처럼 균형을 잃어서는 안 된다. 사람은 지난날의 경험과 상처 때문에 한쪽으로 치우치기 쉽다. 나와 같은 사람들은 종교적 체험에 반감을 가지기가 쉽다. 하지만 에드워즈의 말처럼 성경에도 종교적 체험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그 자체는 결코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종교적 체험이 그리스도를 결코 앞설 수는 없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소수에게만 주어진 것을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긴다. 반대로 아무리 귀한 것이라고 해도 모두가 누린다면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래서 누구나 누리는 산소보다 소수만 가지고 있는 다이아몬드 반지가 더 귀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종교적 체험에도 그러한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 그러다 보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전부'가 아니라 '입문'처럼 여기는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전부'이다. 구원에 있어서는 특히 그렇다. 우리의 구원, 우리의 가치, 우리의 공로는 모두 그리스도께 있는 것이다. 특별한 체험을 주신다고 해서 더 귀하게 여기시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을 자랑하느라 교회를 혼란에 빠뜨린다면 더 큰 죄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글을 마치며

오늘날도 육체에 미치는 감정의 영향에 대한 긍정적 견해와 부정적 견해가 공존한다. 우리의 견해는 각자의 기질과 경험에 영향을 받는다. 하지만 성경의 기준을 벗어나서는 결코 안 될 것이다. 성경에서는 분명 종교적 체험과 육체에 미치는 영향을 긍정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러한 육체적 반응이 참된 믿음의 증거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이해를 벗어난 지체들을 정죄해서도 안 되며, 동시에 비교하며 자신을 열등하게 여길 필요도 없다. 어떤 성향을 가진 사람일지라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이 유일하고 충분한 가치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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