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유발 하라리의 『호모데우스』와 존 오웬의 『성령론』을 읽게 되었다. 유발 하라리는 "무엇이 인간을 다른 동물들보다 우월하게 만드는지" 질문을 던진다. 존 오웬의 글을 통해 질문에 대한 답을 해보려 한다.
진화론적 생명과학은 욕구를 통제 불가능한 것으로 바라본다.(Harari, 391) 욕구는 자연선택에 종속된 것이라고 추정하기 때문이다.(Harari, 389) 하지만 성경적으로 욕구는 자연선택에 의해 결정된 유전자에 종속된 것이 아니다. 욕구는 인간이 범죄함으로 죄의 원리에 종속되어 있는 것이다.(Owen, 735)
진화론적 생명과학은 타락 이전의 상태와 이후의 상태를 구분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성경은 우화일 뿐이며, 그들이 유사 인류라고 주장하는 고고학적 유적보다 가치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웬은 성경에 근거해 무죄한 상태에서 사람의 지성, 감정, 의지의 성향과 능력은 질서 있고 조화로웠다고 말한다.(Owen, 739)
이 시대는 '혼란'과 '무질서'라는 현상을 보고 그 이유를 거슬러 추적한다. 하지만 성경은 그 이유가 죄로 인한 것이라고 분명히 제시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의 목적과 선을 행할 자유의지를 상실한 것은 죄의 영향이다. 죄의 영향으로 인간은 질서와 평안을 상실했다.(Owen, 739)
악한 상태를 치료할 수 있는 유일한 치료제는 '거룩'이다. 우리의 영혼이 거룩해지는 만큼 타락 이전에 누리던 마음의 질서와 정직을 회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Owen, 739) 오웬의 지적처럼, 거룩함 없이 감정의 올바른 질서, 내적 평화, 마음의 진정한 평온을 얻으려는 모든 시도는 헛되다.(Owen, 739)
최근 생명과학의 연구는 단일한 자아나 내면의 소리는 없다고 말한다.(Harari, 400) 그들은 이를 통해 자유주의 신념을 무너뜨리려 한다. 그들은 이러한 시도를 통해 영혼의 개념을 부정하고, 인간을 단순한 유기체로 바라보려 한다. 하지만, 오웬은 이에 대해 심지어 성화된 사람들의 영혼 속에도 싸움과 갈등이 존재한다고 말한다.(Owen, 740) 내면의 소리가 여러 가지인 이유는 거듭난 자의 마음에 성령의 법과 죄의 법이 충돌하기 때문이다. 거듭나지 않은 자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의 마음에는 본성적인 양심의 소리와 죄의 소욕들이 충돌할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죄의 권세 아래 있는 사람들이 더 평안과 고요함을 누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고 주장한다. 오웬은 이에 대해 지옥과 어둠의 왕국 안에 있는 질서와 평화와 같다고 반박한다.(Owen, 741) 그들의 마음은 사탄이 원하는 목적 아래 정렬되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유발 하라리도 그의 저서 ‘호모데우스’에서 세상의 권세가들은 돈, 명예와 같은 편협한 목표와 분명한 방향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말한다.(Harari, 516-517)
거듭난 사람과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내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거듭난 사람의 마음 상태는 '반역'에 가깝지만,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마음은 '혼란'에 가깝다. 반역은 부분적으로 피해를 줄 수는 있지만, 국가 전체를 혼란에 빠뜨리지는 않는다. 성화된 사람의 내면은 죄의 잔재로 부분적인 피해를 받을 수는 있지만, 영혼 전체가 파괴되지는 않는다. 그의 내면에는 '은혜의 원리'가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마음을 지배하는 것은 '죄의 원리'이다. 그래서 그들이 죄가 주는 쾌락을 잠시 누릴지라도 결국은 무질서에 빠지고 마는 것이다. 모든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는 영혼의 부패를 고치는 것이다. 하지만 거듭나지 않는 사람의 마음에 있는 죄의 질서는 영혼의 부패를 고치기 위한 모든 법과 질서를 무너뜨리고 만다.
이를 통해, 이 세상에 만연한 '혼란의 원인'과 '혼란을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을 해석할 수 있다. 인간은 하나님을 떠날 때 질서를 잃고 혼란에 빠질 수 밖에 없다. 1789년 프랑스혁명은 '자유, 평등, 박애'를 외치며 인본주의의 시대 정신을 보여주었다. 그들이 말한 자유는 바로 '하나님으로부터의 자유'이다. 하나님으로부터의 자유를 외친 인간은 세상의 '의미'와 '목적'을 부여해 줄 새로운 하나님이 필요했다. 그들이 선택한 하나님은 '인간'이었다.
거듭나지 않은 본성에게 ‘혼란’은 필연적인 것이다. 그들의 마음을 유지할 '신성한 질서'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혼란 속에 질서를 부여하기 위해, '죄의 원리'를 질서로 삼는 것이다. 하지만 죄의 질서를 따를 때,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평안을 발견할 수 없다. 거듭나지 않은 영혼에도 하나님의 형상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영혼은 참된 평안을 갈망하게 되고, 혼란은 거듭된다.
반면에 거듭난 본성에게 필연적인 것은 ‘갈등’이다. 새 성품 안에는 은혜의 원리가 신성한 질서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남아 있는 죄의 잔재가 끊임없이 반역을 일으킨다. 개별적인 죄에서 패배할 때도 있다. 하지만, 궁극적인 영적 전쟁은 결국 승리하게 된다. 우리에게 언약을 주신 하나님께서 신실하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결국 개별적인 죄에서도 승리하게 되고, 삶의 모든 영적 싸움에서도 이기게 된다.(Owen, 743)
그렇다면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무엇인가? 성경은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한다(고후 10:4). 우리는 스스로의 힘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능력만을 의지할 때, 반드시 승리하게 될 것이다.(Owen, 743) 인본주의자들은 인간의 내면이 세상에 질서를 부여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간의 이성과 감정 위에 세운 세상은 또 다시 혼란스러워졌기 때문이다. 인간의 '내면'이 모래 같다는 것을 깨달은 인본주의자들은 '외부'에서 반석을 찾으려고 노력할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의 자유’라는 원칙을 고수할 경우, 비유기적 알고리즘과 같은 우상에 매달릴 뿐이다. 결국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내부와 외부를 오갈 뿐 혼란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러한 혼란은 신자에게도 찾아올 수 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방법을 통해 은혜를 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은혜를 구하는 것은 '신성한 의무'이다.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신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통해 요구하시는 거룩을 이루어가야 한다.(Owen, 744)
자유주의 인본주의자들과 진화론자들은 ‘성장’을 최고의 가치로 여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성장에 반감을 가져야 할까? 주어진 것에 만족하는 태도는 분명히 가져야 한다. 하지만 거룩이 자라나는 것에 있어서는 결코 만족해서는 안 된다. 세상에서 말하는 성장은 불안과 스트레스라는 폐해를 낳았다. 하지만 복음적 거룩의 성장은 결코 우리에게 부작용을 낳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통해 거룩이 성장하도록 도우시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지정해 주신 은혜의 원리를 활용해 거룩해진다면, 우리에게 주신 성결의 의무는 결코 무거운 것이 아니다. 기쁘고 즐거운 과정이 될 것이다.(746)
안타깝게도, 아직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은 성도의 삶에 그러한 은밀한 능력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그 방식과 힘을 이해하지 못한다.(Owen, 753) 더 안타까운 일은 그리스도를 믿고 시인하는 사람들조차도, 이 원리를 모른채 살아간다는 것이다. 우리가 구원 받았어도, 은혜의 원리를 알고 누리지 못한다면, 이 땅에서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것은 무거운 멍에가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참으로 아름답다. 그들은 ‘산 위의 동네’(마 5:14)처럼 이 세상에 대안을 제시한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우리의 만족’이라는 비전을 제시한다. 하지만, 성경이 제시하는 비전은 더 아름답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만족’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단 한 가지를 요구하신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피가 자신들의 죄를 깨끗하게 했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증언하는 것이다.(Owen, 754) 우리의 증언은 사람들의 멸시를 살 것이다. 우리의 증언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 같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그것으로도 만족해하신다. 이 사실이 우리에게 참된 만족을 안겨다 준다. 이것이 바로 모든 인류가 그토록 찾아 헤매는 참된 만족이 아닐까?
마지막으로 오웬은 우리에게 한 가지를 당부한다. 그것은 바로 복음을 부지런하고 주의 깊게 연구하는 것이다.(Owen, 755) 세상의 많은 사람이 옳은 길을 찾아 헤매지만, 주변 사람들을 통해서는 그 길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웬은 그가 살던 시대를 “어떤 사람을 보더라도, 그가 이교도인지, 무슬림인지, 아니면 그리스도인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시대”(Owen, 756)라고 정의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시대도 비슷하다. 참된 그리스도인이 곁에 있어도 복음으로 눈이 떠지지 않으면, 분별할 수 없다. 그리고 그 사람이 어떤 원리로 살아가는지는 더 더욱 알 수 없다. 우리가 복음을 통해 친히 은혜의 원리를 누려야 맛보아야 한다.
에덴 동산에서 인류는 ‘하나님으로부터 자유’를 찾아 여정을 떠났다. 사단의 유혹에 속아 먼 길을 왔지만, 그가 약속한 자유는 없었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인간은 동물과 다르지 않다는 허무한 결말 뿐이었다. 아버지를 떠난 탕자도 돼지보다 나은 것이 없었다(눅 15:15-16). 누군가의 말처럼, 우리는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조차 모르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제 인류는 먼 여정을 마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의 아버지께서는 먼 데를 바라보다가 우리를 보고 달려오실 것이다. 우리에게 입 맞추며 환대하실 것이다. 죄의 옷을 벗기시고 그리스도의 옷을 입히실 것이다. 그렇게 기뻐하며 잃어버린 자녀의 신분을 회복해주실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만족이다. 그 사실이 우리에게 만족이 된다.
"무엇이 인간을 다른 동물들보다 우월하게 만드는가?" 이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한 첫 단계는 질문을 수정하는 것이다. 바른 답을 제시하기 위해 질문의 전체인 '비교'를 제거해보려 한다.
"무엇이 인간을 가치 있게 만드는가?" 이제는 대답을 할 준비가 되었다.
"그것은 우리를 만족하시는 하나님의 만족이다."
참고문헌:
Harari, Yuval Noah. Homo Deus. 김명주 역. 『호모데우스』. 서울: 김영사, 2017.
Owen, John. A Discourse Concerning the Holy Spirit. 서문강 역. 『성령론 2』. 서울: 새언약, 2026.
